만화리뷰
나의 삶을 이루는 것들 : <이세린가이드>
[5월 에세이] <이세린가이드>, 김정연, 코난북스
손미혜 2021.05.31

나의 삶을 이루는 것들 : <이세린가이드>


△ <이세린가이드> ⓒ코난북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말이 있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올바른 식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역사는 곧 그 사람이 먹어온 음식들이 쌓아온 역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 문장을 빌어 말하자면, 김정연 작가의 만화 <이세린 가이드>은 주인공 이세린이 만드는 음식 모형을 통해 이세린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데뷔작 <혼자를 기르는 법(혼기법)>을 통해 생활툰인 듯 생활툰 아닌 생활툰이라는 독특한 포지션의 작품을 선보였던 김정연 작가는, <이세린 가이드>를 통해 음식 만화인 듯 음식 만화 아닌 음식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내놓았다. 미슐랭 가이드를 대놓고 패러디한 작품 제목 속 이세린은 음식이 아닌 음식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군침 도는 맛깔 나는 음식 묘사와 레시피, 음식의 아름다움과 맛에 대한 과장된 감탄 표현. 우리가 흔히 음식 만화에 기대하는 이 같은 클리셰는 첫 화 '캘리포니아 롤'에서 전면에 등장했다가 한 화 만에 바로 깨진다. 대신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음식 모형 제작 공정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버무린, 한 사람의 직업인이자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세린의 삶이다.

 전작 <혼기법>에서 김정연 작가는 서울에서 혼자 살아가는 20대 사회초년생의 모습을 주인공 이시다의 독백으로 풀어가며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세린 가이드> 역시 <혼기법>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이세린의 독백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비빔밥, 김치, 라면, 빙수 등 매화 클라이언트로부터 의뢰받은 음식 모형을 제작하면서, 그 음식에 얽힌 자신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는 식이다. 이세린의 독백을 들어줄 사람은 오롯이 이세린 자신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세린의 독백은 의식의 흐름처럼 과거와 현재, 경험과 상상을 오가며 두서없이 이어진다. 때로는 PVC에 클라이언트를 넣고 굳힌 모형이나 생전 잔반으로 하는 리얼 지옥 먹방 같이 터무니없는 농담과 잡생각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세린의 독백은 청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야기의 본질에 직접 가닿는다. 혼자일 때 가장 진솔해지는 우리에게 가장 꺼내기 힘든 내면의 숨겨둔 이야기, 바로 가족이다.

 <혼기법>에서 이시다의 독백이 도시와 공간을 핵심 구성요소로 했다면, 이세린의 독백을 채우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가족과 관계이다. 특히 <혼기법>에서 보여준 작가의 정곡을 찌르는 특유의 비유법과 촌철살인은 가족에 대한 <이세린 가이드>의 묘사에서 빛을 발한다. 선택할 수 없기에 피차 조심하지 않는 가족을 경쟁 업체가 없기에 맛집일 필요도 없는 놀이공원 내 음식점에 비유하거나, 집안의 기둥인 두 오빠와 달리 아무런 기대를 받지 못했기에 어떤 투자도 받지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지탱할 기대가 없었던 탓에 별 부담 없이 집을 나올 수 있었던 자신을 젠가 조각에 빗대어 표현하는 장면들은 가족을 바라보는 김정연 작가의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 이세린이 자신을 젠가에 비유하는 장면


 그러나 가족에 대한 감정을 적확한 비유법처럼 명확하게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가부장제로부터 독립한 이세린은 가족 김장 모임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지만, 엄마가 억지로 보내준 김장김치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그런 가족에게 느끼는 미움도, 짜증도, 고마움도 아닌, 아직 이름 붙인 적 없는 어떤 감정들. 가족들과의 식사는 혼나는 자리가 되곤 하기에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아무리 먹여도 살이 붙지 않는 딸 때문에 늘 한마디씩 들어야만 했던 엄마에게 느끼는 어떤 죄책감. 딸이 늦기 전에 멀리멀리 가보고 이것저것 많이 먹어보길 바라면서도, 딸에 대한 기대치는 대통령도 아닌 영부인이 최대였던 엄마가 주는 어떤 비참함 따위들. 냄비를 끓일수록 나오는 건 국물만큼 진한 감정의 결들이다. <이세린 가이드>는 그런 모호하고 복잡한 관계의 결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해 나가고, 이세린의 목소리는 얽히고설켜 차마 풀어내지 못한 관계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관통한다.

 


△ 엄마가 기어코 보낸 김장김치를 차마 무시하지는 못하는 이세린 (출처 : 교보문고)

그렇게 끓여져 나온 전골의 맛은 과연 구수할까, 얼큰할까, 매콤할까. 자연사 박물관의 전시 모형 제작자를 꿈꿨으나 어쩌다 음식 모형을 만들고 있는 이세린처럼, 베이스로 무슨 재료를 넣었는지가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가도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조합이 독특한 풍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김정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만화는 한국 음식이 나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차지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대로 독자에게 <이세린 가이드>는 우리가 살면서 맺어온 관계가 어떻게 나라는 한 개인의 부분을, 때로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지 질문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답변은 아직 내릴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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