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한낮의 태양 빛에도 발밑엔 늘 그늘이 있다 :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11월 리뷰]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오드 메르미오, 롤러코스터
주다빈 2021.11.22



한낮의 태양 빛에도 발밑엔 늘 그늘이 있다 :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디저트를 먹고 나와서 광장을 지나며 한 무리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모두 녹색 옷을 입고 삼삼오오 어울려 있었다. 여행자로서 사람이 북적이는 공간이 감사하면서도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소매치기가 일어날 수도 있고 괜한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사람은 적지만 광장이 보이는 곳에 앉아 광장을 둘러보았다. 스페인어를 전혀 몰랐기에 지켜봤다 해서 알아들을 순 없었고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받게 되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이내 자리를 떴다. 나중에 낙태 합법화를 위한 시위였단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아르헨티나를 떠나 한국의 시간에 익숙해질 무렵, 뉴스를 통해 낙태 합법화 법안이 통과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먼 나라의 10평 정도 되는 거실에 앉아서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임신 중절과 같은 이야기가 양지에서 이야기되지 못한다. 이런 문제가 음지에 있을수록 우리는 해당 사안에 대해 추측하고 예상하게 된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가리기 쉽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어렵게 한다. 그래서 <나의 임신 중지 이야기>와 같은 그래픽 노블이 우리나라에 필요하다. 임신 중절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문제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의 임신 중지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8년 전 임신 중지를 겪고 오늘에 와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어렵게 써 내려간다. 8년의 세월은 누군가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10년보다 약간 모자란 시간이다. ‘임신 중지’를 떠올릴 때 우리는, 수술 순간의 고통과 가까운 미래의 고통만큼만을 생각한다. 도대체 그 슬픔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하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임신 중지를 겪은 여성은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는 8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이제 조금은 편해질 준비를 한 듯하다. 이 그래픽 노블을 읽으면 임신 중절이 그리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작가는 꽤 빠르게 임신 중절을 선택했다. 자신은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고, 아빠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녀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위로에 닥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마 위로를 건네는 이들이 하는 말처럼 임신 중절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본인은 일하고 외출했고 때로는 웃었지만 마음을 한순간에 어둡게 하곤 했다고 밝힌 것처럼 말이다. 임신 중절을 통해 겪게 될 심리적 압박과 슬픔은 임신 중절을 겪은 뒤에도 불순물처럼 한 번씩 마음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가라앉을 것이다.


 이 책의 좋은 점은 기존의 여성 서사 책과 달리 남성 의사의 시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다기보다는 임신 중절을 경험한 여성과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분리돼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의사의 행동을 통해 그간 내 생각을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었다. 오지랖을 부려 반복적으로 낙태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피임의 중요성과 피임 방법을 알려주고 싶단 생각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안락한 삶’을 사는 나로선 발언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각각의 사람들은 각각의 삶의 터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존해 나가고 있을 테니까. 또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0.00 몇 퍼센트로 임신을 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어떠한 이유로 임신을 경험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좋아서 임신 중지를 하는 여성은 없다. 그러니까 임신 중지를 선택할지라도 즐거워할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늘이 꾸준히 그녀들의 뒤에 눌어붙는다. 우리 사회가 임신 중지와 여성의 경험에 대해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또, 더는 임신 중지에 대한 비난과 책임이 여성에게만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임신 중지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녀는 삶이라는 전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로 노력하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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